아브라함의 여정, "가라"
"가라"는 말씀을 따라 가나안으로 출발한 아브라함의 여정을 생각해 봅니다. 다시 쓰는 a4qt, 첫 글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아브라함입니다.

일단 호칭부터 통일하자.
'아브람'이었다가 '아브라함'으로 이름이 바뀌다보니 성경을 아직 잘 모르면 갑자기 다른 사람 이야기가 나온 듯한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일단, '아브라함'이라고 하기로 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 창세기 12:1
다른 설명이 없다. 그저 떠나라는 것 뿐이다.
말 그대로, "어느날 갑자기", "가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지역의 도시, 우르였다. 우르는 발달된 도시농경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어디로, 얼마나 가야하는지도 모른채 단지 떠나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이사나 이민 보다 더 심각한 일이다. 도시 생활을 하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유목민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가라'는 말씀과 함께 몇 가지 약속이 주어졌다. 이 약속들은 창세기 12장1절-3절에 기록되어 있다.
앞으로 갈 땅을 보여주겠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통해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다.
이 약속들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70세가 넘도록 자식이 없는 사람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말을 들을 때 쉽게 믿어질까? 약속은 이루어지기 전이고 이루어질 것이라는 증거나 단서도 없다. 약속일 뿐. 오직 말(씀)뿐인 약속이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 창세기 12:4
누군가 "참 허황된 약속"이라며 비꼬는 말을 해도,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정말로 갔다. 도시 사람이 부동산을 처분하고 이동할 수 있는 소와 양으로 소유의 형태를 바꾸었다. 손에 잡히는 것은 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갔다.
그래도 뭔가 아는게 있었겠지, 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본문에서 그런 것을 찾지는 못한다. 기록되지 않은, "행간"에 숨어 있는 사건들이 있었을까? 어쨌든 아브라함은 우르를 떠났고, 가나안으로 향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아브라함에게 "어서오세요 여기부터 가나안입니다", 뭐 이런 것은 당연히 없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곳이었지만, 이미 정착민족이 있었고 그들에게는 성읍도 있었다. 말씀을 믿고 지시를 받으며 도착한 땅은 주인 없는 땅이 아닌 것이다.
괜히 ‘가나안 땅’이라고 부르는게 아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들의 땅, 가나안’이었다. 왕도 있고, 성도 있다. 자식 하나 없는 떠돌이 나그네가 가나안 땅을 가질 수 있을까? 가지려면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 어디로 가며, 누구를 먼저 만나야 땅을 차지하기 전에 생존을 확보할 수 있을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 창세기 12:7
성경은 가나안에서 아브라함이 가장 먼저 행한 일이 제단을 쌓은 것이라고 증언한다.
제단을 쌓고, 제물을 잡아 제사를 드렸다. 가나안 땅에서의 첫 예배다.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힘든 여정을 마쳤지만 땅은 다른 사람들의 것고 여정은 좀 처럼 끝날 것 같지가 않다. 게다가 그도, 그의 아내도 하루 하루 늙어가고 있다. 그래도 다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것을 드려, 땀 흘려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 히브리서 11:15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 요한복음 8:56
나는 아브라함의 시선이 어디에 닿아 있었을지를 생각한다.
처음부터 그의 눈에, 그의 가슴 속에 장차 이루어질 일이 선명하게 보였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 처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한 그 순간이 우르에서 집과 땅을 처분하고 소와 양으로 바꿀 때이거나 가나안에서 첫 제단을 쌓을 때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잘은 모르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 그런 것이 있었을까? 아브라함은 아내에게 이 모든 상황을 속시원하게 설명할 수 있었을까?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시선은 아직 내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가나안을 향했듯이, 지금 여기, 눈 앞의 현실에만 머물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큰 일들, 거기까지 시선을 닿으려면 아직 멀었다.
그렇다고 우르에서 발등만 쳐다보고 있지는 않았다.
누구에게나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때로 하나님의 뜻은 급해 보이거나 자세한 설명이 없을 때가 있다.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 뜻은 알겠으나 내가 가진 정보가 지나치게 적을 때, 그 순간을 "믿음이 필요한 때"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사도행전에는 아브라함처럼 그저 "가라"는 말씀만 들었던 사람이 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 사도행전 9:10-11
아나니아는 망설인다. 자신이 사울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주님께 아뢰었다.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한 일들도, 다메섹 까지 와서 성도들을 체포할 권한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아나니아가 들은 대답은 "가라"였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 사도행전 9:15
발등만 보며 망설이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때로는 알기 때문에 갈 수 없고 때로는 모르니까 못간다. 아브라함과 아나니아는 "가라"는 말씀을 따랐다. 가나안 땅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아브라함도, 사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던 아나니아도 "가라"하시니 갔다.
아는 것이 너무 없어 두렵거나 아는 것이 너무 많아 망설이거나, 내가 발등만 쳐다보고 있을 때, 이 두 사람을 떠올리며 움직일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