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도착한 최초의 개신교선교사, 독일인 귀츨라프
최초의 한글 주기도문 번역과 한글을 서양에 소개한 사람은 독일인 선교사 귀츨라프였습니다. 귀츨라프는 한국에 도착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입니다.

나는 이 포스팅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독일에 있는 한국인선교사로서 나는 한국과 독일을 이어주는 인물과 사건에 관심을 갖고 있다. 나는 꾸준히, 그리고 신중하게, 앞으로 포스팅할 인물과 사건의 목록을 만들고 있다. 오늘 소개하는 인물은 그 목록에서 가장 첫 번째 줄에 있다.
한국에 온 첫 선교사들
선교사로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맨 처음 한국에 도착한 선교사가 누구인지, 궁금증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선교 초기 역사를 살펴보기 시작했을 때, 내가 들은 이름은 Thomas, Allen, Underwood, Appenzeller였다.
1866년, 영국 출신의 Robert Jermain Thomas는 순교자가 되었다. 그는 불타는 배에서 성경책을 대동강 강변을 향해 던졌다. 그 성경책을 통해 훗날 많은 회심자가 일어났다. 회심자 중에는 그에게 칼을 휘둘렀던 사형집행인도 있었다.
1884년, Horace Newton Allen은 갑신정변으로 전신에 칼을 맞고 죽어가던 민영익을 치료하는데 성공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이 세워졌다. 제중원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1904년 명칭을 바꾸어 현재의 세브란스병원이 되었다.
1885년 부활절에 도착한 Underwood와 Appenzeller는 교회와 학교를 설립했는데 지금의 연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가 되었다. Underwood와 Appenzeller의 무덤은 한국의 수도 서울에 있는 외국인 묘지에 있다. 이들은 아직 "조선"으로 알려진 한반도에 찾아온 초기 선교사들이었다. 이들 선교사들은 입국이 금지된 시대에 헌신적인 선교사역을 펼쳤다.
그러나, 지금 소개한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아니다.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독일인 귀츨라프였다. 그는 한국에 도착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이며 한국 방문이 확인되는 최초의 독일인이다.
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 주요 이력
- 의사
- 통역사
- 선교사
- 신학./선교 훈련
- 1800년, 베를린 선교학교
- 네덜란드 선교회(Netherlands Missionary Society, 1797 설립)에서 3년간 선교 훈련
- 주요 활동
- 제1차 아편 전쟁 중, 영국 측 통역관
- 선교 방문
- 조선(1832년) 방문
- 태국 방콕(1828) 방문
- 저서
- 《1831~33년의 중국 연안의 3번의 항해 일지 - 시암, 조선, 류큐 제도의 관찰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1832 and 1833, with notices of Siam, Corea, and the Loo-Choo Islands)》(1834년)
귀츨라프의 서해안 방문
1832년, 동인도회사 소속 '로드 에머스트 호(Lord Amherst)'가 한반도 서해안을 따라 항해했다. 귀츨라프는 그 배의 의사이자 통역관이었다. 배는 '안전한 정박지'에 닻을 내렸고 귀츨라프는 주변 섬과 해안 주민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의사, 통역관의 역할만 하지 않았다. 그는 선원들을 위한 의사, 통역관이기 전에 선교사였다.
귀츨라프의 어린 시절과 선교 훈련

귀츨라프는 1803년 Westpommern의 Pyritz에서 태어났다. 귀츨라프의 유년기는 혹독했다.
매우 어릴 때 어머니의 죽음을 겪었고 그 후로 두 명이나 되는 계모들의 손에서 자라며 힘겨운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암울한 유년기를 지난 후 귀츨라프는 안장제작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경로는 십자가로 인해 변경되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귀츨라프는 독일 경건주의의 풍성한 영적 자산을 소유하게 되었고 마침내 베를린에 세워진 독일 최초의 선교학교로 향했다. 또한 네델란드 선교회(Netherlands Missionary Society)에서 선교훈련을 받았고 현재의 인도네시아로 파송되면서 본격적인 아시아 선교에 뛰어들었다.
귀츨라프는 여러 개의 아시아 언어를 배웠다. 그는 언어에 탁월한 재능을 받은 사람이었고 태국어 성경을 번역했으며 중국어 사전, 일본어 사전도 편찬했다.
1827년, 자카르타에서 중국어를 배우며 중국선교를 준비했다. 그의 중국선교는 매우 열정적이고 헌신적이었다. 중국 이외에도 태국 방콕, 마카오, 중국 상하이를 찾아갔으며 여러 아시아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데 참여했다. 열정적인 중국선교의 열매로써 그는 중국어 성경책을 가지고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한국선교
1832년 7월 27일이 한국기독교역사의 기념일이 되어야 한다.
귀츨라프의 일지에 "Yang-yhi"라고 기록된 젊은 한국인 관리는 귀츨라프에게 한글 자음과 모음을 적어 주었다. 아시아 여러 언어를 배운 귀츨라프는 한반도의 작은 나라가 고유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Yang-yhi에게 중국어로 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이 한국선교 최초의 주기도문 번역이다.
성경 전체, 혹은 복음서나 시편이 번역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주기도문 뿐이었지만 한국 선교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내가 귀츨라프의 선교 활동을 인상깊게 생각하는 것은 이제부터 이야기할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한글을 소개하다
귀츨라프는 < The Chinese Repository >에 한글을 소개하는 기사를 기고했다. "Remarks on the Corean Language"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하여 그는 한국 고유의 문자를 서양세계에 소개했다. 선교사들의 위한 매거진이었던 < The Chinese Repository >가 지금의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만큼 파급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귀츨라프의 기사가 가진 역사적 의미는 '오징어 게임' 보다 크다고 생각한다.
(2) 감자재배 기술을 전하다.
"독일에서는 감자와 부어스트를 먹습니다. 그 밖에 감자와 부어스트, 또 감자를 먹습니다."
독일인에게 감자는 지겹지만 의미있는 식재료다. 독일인들은 아무리 식량이 부족해도 감자는 먹지 않았다. 개도 안 먹는 감자. 이것이 감자의 이미지였다. 그런 감자를 인기있는 식재료로 생각하도록 전국민의 "의식"을 바꾸고 그 공로로 < Der Kartoffelkönig=감자대왕 >로 불리는 왕이 프리드리히 2세다.
그는 <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ße >로 불린다(Große는 영어로 Great). 18세기 유럽 통치자들 중에 "대왕-Great"칭호로 불리는 통치자는 프리드리히 2세와 러시아의 예카테리아 2세 뿐이다.
귀츨라프는 한국의 Friedrich der Große가 될 수도 있었다. 귀츨라프가 한반도에 감자를 최초로 소개한 인물은 아니겠지만 한국인들에게 서양 감자 재배법을 가르친 것은 사실이다. 해마다 춘궁기를 겪어야 했던 한국인들에게도 더 많은 감자가 필요했으니까.
안타깝게도 그의 한국선교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겨우 한 달 만에 그를 태운 배가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선교활동을 한 기간은 매우 짧았다. 그에게는 분명한 한계점이 있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서양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가 승선한 배의 정박기간도 매우 짧았다. 그럼에도 그의 선교활동은 선교사들에게 중요한 통찰을 준다.
귀츨라프는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기간 동안 선교사로서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전해 주었다. 또한 뛰어난 관찰자였다. 선교지의 고유한 문화를 관찰했고 자신이 출발한 서양세계에 전달했다. 나는 그의 사역에서 양방향 소통을 발견한다. 자신이 가진 복음과 의사로서의 지식과 농사기술을 전했다. 한글의 우수성과 가치를 발견하고 유럽세계에 알렸다. 선교지에 줄 것은 있어도 받을 것이나 배울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선교사가 있다면 귀츨라프의 사역에서 분명 배울 점이 있다.
안타까운 결말
귀츨라프의 선교 사역의 결말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했다. 그러나 모든 선교사역의 끝이 반드시 아름답고 풍성한 것은 아님을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는 거두는 사람은 아니라 심는 사람이었다.

귀츨라프의 선교사역의 가장 큰 목적지는 중국이었다. 그러나 중국선교사역의 열매는 그가 보여준 사랑의 크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중국 정부가 서양 선교사들의 활동을 제한하자 귀츨라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언할 중국인 전도자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많은 중국어 성경책이 제작되어 전도자들에게 지급되었고 성공적인 전도활동을 증언하는 선교보고서들이 도착했다. 그러나 상당수 보고서가 거짓이었다. 선교비는 적절한 용도로 쓰이지 못했다. 귀츨라프가 보낸 중국어성경책은 인쇄소에 팔렸고 새로운 성경책이 주문되면 값싸게 사들인 성경책이 귀츨라프에게 보내졌다. 실제로 현장에서 선교활동을 한 전도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는데 이런 사실들은 허드슨 테일러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그가 양성한 중국인전도자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해서 그의 선교 사역이 무의미한 것은 결코 아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귀츨라프를 가리켜 "중국 선교의 조부"라고 했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허드슨 테일러가 귀츨라프를 "중국선교의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한국인들이 귀츨라프를 기억하는 방식
현재 충청남도 보령시에 속한 < 고대도 >는 귀츨라프가 상륙한 섬으로 기억된다.오랫동안 귀츨라프가 방문한 섬이 어디였는지 확정할 수가 없었다.
끈기있는 연구와 노력 끝에 현재는 < 고대도 >가 귀츨라프가 상륙했던 섬으로 밝혀졌다. 이제 < 고대도 > 에서는 귀츨라프의 상륙과 선교를 기념하고 있다. 고대도에는 특별한 기념일이 있다. 바로 "귀츨라프의 날"이다.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독일인이자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써 귀츨라프를 기념하는 날이다.
한국 귀츨라프 학회에서는 < 귀츨라프 선교사의 조선 방문 >을 출간했다.
독일을 비롯한 모든 유럽이 선교지라는 사실 앞에서, 나는 귀츨라프를 생각한다.
우리는 빚을 졌다.